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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에 은혜 갚은 베트남 왕자, 좋네요
    카테고리 없음 2020. 1. 14. 22:49

    화산 이씨는 베트남에서 유래한 한국 성입니다. 본관 화산은 황해도 옹진군에 있는 지명입니다(광복 당시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 화산인 이씨는 비중국계 귀화성으로, 중시조는 이용상입니다. 시조는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 황제의 이태조 이공 온(리 왕조 태조·lýcônguẩn)이며, 중시조 이용상은 7세의 손자이며 6대 황제 영국 종파 이천 조(이 천조·lýthiêntộ)의 1배번째 아들입니다. 만약 정선 이 씨의 시조 이양홍은 후손과 종조부 사이며, 1226년 알에 왕족이 살해되자 화를 피하려고 측근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표류~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정착했었다고 전하겠습니다. 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연민하여 그에게 땅의 지역을 주고 그를 화산군에 봉하여 정착을 돕고 원본이기 때문에 침입했을 때는 지면주민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다음으로 그의 자손이 이용상을 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화산 이 씨 종친회에서 1995년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돔 야오빈당 소키쟈은을 비롯한 베트남의 리더들이 그들을 환대하고 베트남 인과 동등한 법적 대우 및 왕손 인정 등의 호의를 베풀었다. 베트남인이 한국을 방문할 경우 방문도 관례가 되어 화산인 이씨가 양국 관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소리료크 3월 151이면, 종친 회장을 비롯한 종친회 간부들을 기념식에 초대하고 행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2002년 12월 베트남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화산 이 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 왕자의 1대기를 공연했습니다. 2000년 경제 기획원 인구 연구 결과 현재에만 230여가구, 1,7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본관이 있으며 황해도의 집성촌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베트남과 한국의 1의 관계는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입니다. 베트남의 번영시대인 "리왕조"가 트랑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마지막 왕자 이용상이 배를 타고 황해도 옹진이가 배를 타고 황해도 언진으로 피난을 갔고 그 후 "화산 이씨"로 개명했다. 고려 무인시대의 "이의민"이 월남(화산) 이씨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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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에 보답했다 베트남 왕자 이용상 고려 고종 때는 세계 최강의 몽고군과 30여년간 전쟁을 지속하는 시기이다.지장인 이용상은 이 몽골군과의 전투 중 특히 방어전의 귀재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하나 253년 하나 2월 온 인 송 마을의 수장이 이용상에 달려와서 몽골군이 밀고 줬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이에 이용상은 수락하고 수성 전략을 세웠다. 삼면에 토성으로 성벽을 쌓고 전면에 목책을 높이 세우고 성벽을 철저히 방비했다. 몽골군이 5개월 이상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않았다. 전투가 장기화되자 몽골 장수는 "거짓 항복으로 화친을 요구하는 "이라며 황금을 가득 집어 넣은 상자 5개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용상과 마을 낙수령은 그물값을 높이 쌓아 위엄을 보이며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상자를 보내오자 이용상은 이에 의심을 품고 몽골군이 보낸 상자를 묶어 구멍을 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구멍을 뚫었더니 한 명이 자객이 있었다. 이용상은 그 구멍에 뜨거운 물을 부으라고 명령했다. 자객이 죽어서 그 상자를 금종이로 칠하고 적진에 던지라고 했다. 몽골 장수는 상자를 돌려받은 후 깜짝 놀라 군대를 급히 돌렸다. 이용산의 지시로 매복하는 고려 병사가 기습해 몽골군을 격파하고 수백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에 고려 고종은 이용상의 벼슬을 높이고 웅진 화산 지방 30리 인근과 식우프 2천호를 하사 받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 문미에 "수항문"이라는 글자를 써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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